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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사람 링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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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시일2009-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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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예문

     

    본문 : 창12:1-4 | 제목 : 제목 약속을 믿는 믿음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 제일 궁금한 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어떤 식으로 대화가 되느냐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내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고 또 하나님의 뜻을 내가 받으면 여기에 아무런 하자가 없을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일반 종교나 기독교에서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사람에게는 언어가 있고 또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이라는 계시를 주시기에, 언어를 통한 기도와 계시가 되는 말씀으로 서로 통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부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있는 능력이 먼저 그 인간에게 먼저 도달해 있어야 해석이 가능한 겁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하려는 것은 그저 문자요 육으로 해석하는 것 밖에 안됩니다. 고린전서 2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육은 영의 말씀을 분별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 채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 쪽에서 제시하지 않은 특별한 방식이 요구됩니다. 이 채널이 바로 '언약'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날 보지 말고 나의 언약 쪽으로 얼굴을 돌려라"라고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따로 남겨준 분을 찾아라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 앞에서 내 방식을 없애 버리면 되는데 만약 내 방식을 고집한다면 혼란이 초래됩니다. 아브라함 속에는 장차 오실 예수님이 들어 있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1:1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예를 들면, 러시아 여행 하고 온 사람이 가지고 온 인형이 있습니다. 분명히 한 개의 인형입니다. 그런데 그 인형을 열어보니 또 다른 작은 인형이 들어있고 또다시 열어보니 그것보다 더 작은 또 다른 인형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마치 앙파 껍질 벗기듯이 말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자신이 자신을 믿으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탁 깨어지면 그 안에 생명이 되는 이삭이 톡 튀어나옵니다. 자... 이삭 시대가 왔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삭을 믿어야 구원받는 줄 알고 이삭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이삭이 탁 깨어지고 보니 그 야곱이 들어 있었습니다. 야곱이 딱 깨어지니 그 안에 요셉이 들어 있었습니다. 결국 나중에 보니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 미리 아브라함 보내고, 이삭 보내고 야곱 보낸 겁니다. 자...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와서 예수님을 이미 알아버린 자에게는 더 이상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같은 것은 몰라도 되겠네요? 아예 가위를 가지고 구약 성경을 잘라내어 버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었지만 그들과 그리스도의 관계라는 것이 오늘날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 말씀은, 즉 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을 구약을 통해서 파악하는 겁니다. 그들의 입장이 곧 우리의 입장을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죠. 그들의 실수와 오해가 곧 예수 잘 믿고 있다고 자청하는 우리들의 실수와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했다고해서 아브라함이 완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수 투성이, 죄 투성인 아브라함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도 하나님이 관여하니까 구원이 되고 용서가 되고 의인이 되더라 이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겁니다. 이삭 같은 경우를 보면, 본인의 취향이 둘째 아들이 아니라 큰 아들이라서 복을 큰 아들에게 몰아주기 위해 축복을 했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이삭의 의도를 꺽어 버렸습니다. 큰 아들 자리에 이삭이 싫어하는 둘 째 아들로 바꿔치기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빙자해서 자기 욕심 위주로 살아가는 것이 전혀 하나님과 무관한 짓임을 이삭을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는데 그 주신 언약을 대하는 사람마다 자기 '그리움', 자기 소망을 갈구하는 수단으로 써 먹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어야 돼"하면 다른 쪽에서 "아니야, 하나님은 내 편이어야 돼"라고 나오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수난받고 곡해되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언약은 어떤 내용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 가족을 크게 하시면서 떠나기를 강요하시는 겁니까?
    자기 고향에서 크게 하시면 왜 언약이 되지 못하는 겁니까?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나서서 민족 민족을 구분하시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민족과 전혀 다른 민족을 만드시려고 합니다. 분리 하시므로 말미암아, 인간적인 방법으로 국가와 민족을 이루어 온 것과 하나님이 관여해서 새로 생긴 민족과 국가를 상호 비교시키려는 겁니다. 인간들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총의 대결이지요. 하나님이 손 댄 민족이 얼마나 대단하게 되는가를 말입니다. 이것은 타 민족이 보고 믿음으로 복이 다른 민족에게도 전달될 수 있게 하시려는 겁니다. 따로 처리하고 따로 취급하시는 겁니다.

    둘째로, 복의 근원이 되는 요건에 왜 아브라함 이름이 창대케 되는 것이 필요할까요?
    자손이 많아진다든지 재산이 늘어나는 것으로 왜 복의 근원이 될 수 없고 하필이면 아브라함의람 이름 그 자체가 창대해야지만 복의 근원 구실을 다 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장차 인간들이 구원받을 때, 여타의 인간 이름과 구원받게 할 이름을 구별 짓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 못받 게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름은 구원의 능력을 베풀 수 없다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고 특별히 아브라함의 이름에는 구원의 능력이 차별적으로 들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을 때는 일단 내 이름을 믿는 행위가 거부되고 절단됩니다.

    셋째로, 하필이면 왜 지시할 땅이 따로 존재하는 겁니까?
    그냥 아무 땅이나 보통의 땅이 아니라 ‘지시할 땅’에 가야한다는 겁니까? 아브라함이 가는 곳은 어느 곳이든 복의 근원이 되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아브라함이 서울 가면 서울을 복의 본부로 삼으면 되잖아요? 왜 하필이면 가나안 땅을 고집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사실 아무도 살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강림하신 땅이기에 그러합니다. 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닙니다. 사실 원주민들이 있지만 이들은 어차피 다 쫓겨나가야 되고 다 멸절 당 해야 하는 자입니다.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죠.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먼저 선점하신 땅이기에 하나님과 생활을 같이 못할 자들에게 도저히 생존이 불가능한 땅입니다. 하지만 살 수 없는데 그 땅에 살 수 있게 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 은혜을 입은 자에 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불러준 자들에게만 하나씩 그 땅에 심듯이 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 땅에서 죽어야 합니다. 막벨라 굴에 묻혀야 합니다. 누구든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는 곳이 가나안 땅입니다. 죽어야 사는 땅, 그 곳이 장차 천국을 설명하기 위해 설치된 땅이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따로 뽑은 놓은 백성과 자녀는 따로 있습니다. 그들을 다루시면서 하나님은 언약적으로만 다루십니다.
    떠나라 할 것이요, 그들의 잘못을 알게 할 것이요, 누가 자기들을 대신해서 죽으신 것을 알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이라는 것은 인간이 쟁취하는 것이나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언약 안에서 사전에 마련해 두셨다는 점을 알게 합니다.
    노아가 방주 만들어 놓았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새로운 저주 거리가 생긴 겁니다. 일부로 지옥가려고 죄 더 짓고 방탕 생활 안 해도 방주에 안 들어가는 것으로 저주 받는데 충분한 것처럼, 예수님의 존재도 그러합니다.
    이 시대에 지옥에 더 깊이 들어가고 더 빨리 들어가기 위해 악 쓰고 죄를 찾아가며 짓지 않더라도, 예수에게 무관심하면 곧 그것이 저주의 자리입니다. 복의 근원, 예수님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주의 자리가 자동적으로 발생된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는 하나님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