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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예문 본문: 에베소서 2:11~22 제목: 막힌 담을 허시고 어느 시골에 물질적으로 유복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어찌하든지 돈을 벌고 물질로 성공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서, 아침 일찍 들에 나가면 저녁 늦게 들어와 잠자리에 드는 단조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정다감하여 예술을 논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아내는 그런 생활이 불만족스러워, 남편에게 함께 관광을 하자고 늘 간청을 했지만 남편은 무뚝뚝한 태도였습니다. 그런 남편의 태도에 아내는 탄식을 하다못해 소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부인은 시름시름 앓다가 맹장이 터져 복막염이 되었습니다. 맹장을 수술한 뒤에도 부인은 회복되지가 않아 마침내 의사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유는 부인이 살려고 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편이 자기의 팔을 걷고 수혈을 해주라고 의사에게 요청했습니다. 다행히 같은 형의 피였지만, 시골 병원이었으므로 남편의 팔에서 아내의 팔로 직접 수혈을 해야만 했습니다. 아내는 수혈을 받는 동안에 남편이 말없이 자기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 속에 온갖 미운 감정을 씻어낸 뒤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가망이 없는 인간’ 들에게 소망을 수혈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구간이라는 가장 비천한 곳에서 탄생하셨을 뿐만 아니라 ‘머리 둘 곳도 없는’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피를 모두 쏟으시고 고난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고난의 생애는 살 소망을 잃고, 죄 아래서 죽음을 기다리는 인류에게 참된 소망과 행복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처음 세상은 평화 그 자체였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심으로 소망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사람의 마음에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평화가 깨어지고, 행복이 사라졌습니다. (롬5:12) 죄로 인하여 이처럼 평화가 사라진 세상에는 그늘진 곳이 생겨났습니다. 즉,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죄로 인해 사라진 평화와 이로 인한 소외된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라진 평화를 회복하고, 참된 소망 안에서 인류가 하나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오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평화의 상실로 소외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11~12절을 봅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에베소교인들의 상태가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때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고, 연약의 약속들에 대하여 외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상태 그대로 였다는 말입니다. 이방인들을 향한 유대인들의 소외는 매우 철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매우 경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지옥 불의 연료로 사용되기 위하여 창조하셨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든 모든 민족들 가운데 오직 이스라엘만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이방인들은 유대인에게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결코 만날 수 없는 중간에 막힌 담으로 인해 철저히 막혀 있었고, 말 그대로 원수지간이었습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중간에 막힌 담을 그리스도께서 허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중간에 막힌 담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둘레에는 제사장들의 뜰이 있었고, 뜰 동편에 유대인들의 뜰(유대인 남성을 위한)이 있고, 그리고 조금 더 가서 여인들의 뜰(유대인 여성을 위한)이 있었습니다. 이 세 뜰은 모두 동일한 높이에 있는 뜰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다섯 계단 내려오면 벽이 하나 있고, 벽의 다른 한쪽으로 다시 열네 계단을 내려가면 다른 벽이 또 하나가 있는데 , 그 너머가 바로 이방인들의 바깥뜰이었습니다(마26:69). 높이가 1.5미터 가량인 돌로 쌓은 이 벽에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곳곳에 “이 벽을 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이방인은 결코 성전 지역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12절의 “그 때에”라는 접속사가 바로 그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예수 믿기 전의 우리의 상태가 바로, 우상과 미련한 세상 풍습과 육체를 따라서 살아갔던 이방인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어두움 가운데서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야만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만히 두어도 저절로 영원한 형벌을 면치 못하는 처지로 전락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스스로는 대단한 식견과 야망과 자만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모두가 다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 허망한 일입니다. - 갈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삶은 어떠한 삶이든지 참된 소망도 만족도 행복도 없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길이 없습니다. 단지 이 땅에 사는 동안의 육체적인 삶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사람일뿐입니다. 2. 화해자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본문 13~18절을 보세요. 13절의 “이제는” 이라는 접속사는 상황의 반전을 나타냅니다. 즉, 우리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새로운 것은 ‘때가 찬 경륜’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실 때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이루실 것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이제 이방인으로서 소외당하고, 멸시받았던 시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하나님과 멀리 있었고, 서로서로도 멀리 있었습니다. 마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멀리 있었던 것과도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불신과 소외를 끝내고 평화와 화해의 시대를 여는 것이었습니다. 19절의 “그러므로” 이하는 오늘 말씀의 결론부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하는 삶의 모습을 말씀 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한 가족” 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믿음의 공동체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성도 개개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서로 연결되어 함께 지어져 가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평화의 계절에, 예수님께서 이루신 평화와 소망과 행복을 누리며 나누는 아름다운 시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